• 이미지

    이미지로 먹고사는 사람들, 연예인도 그렇다 할 수 있고 정치인도 그렇다 할 수 있고, 가끔은 이미지로 먹고살면 안되는 사람들이 이미지를 가공하여 허구를 추구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들이 만드는 이미지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목적은 시선이다.

    전여옥이 계속 그 더러운 입을 지껄일 수 있는 이유도 그렇고 나는 그가 상당히 성공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이미지는 상당히 취약한 약점이 있다. 그 이미지가 대중의 도덕성에 위반된다면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의 도덕성과 한국의 도덕성을 말도 안 되게 비교한다면, 성에 대한 입장이 상당히 차이를 보인다.

  • The Life Pursuit, Belle & Sebastian

    Belle & Sebastian의 새 앨범이란다. 들어보란다.

    솔직히 별 볼일 없다. 내 예전의 인내심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한 곡도 끝까지 듣기가 힘들다. 이놈들도 영국의 떼거지음악인가? 예전 앨범도 다 들어본 것 같은데 공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재미라도 있는 Pulp가 그리워지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그래도 Iggy Pop이 낫다. 그래도 David Bowie이 낫다.

    누구 묻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들만 생각이 나는지 의문이다. 편협한 것이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기를. 내 귀가 이제는 늙지 않았는가 걱정하지 않기를.

    2/5

  • Tord Gustavsen Trio의 The Ground

    피아노, 더블 베이스, 그리고 드럼. 피아노는 그것으로 언제나 충분하다.

    음악에서 3의 의미는 신학에서의 3보다 더 크지 않을까. 덧칠하고 덧칠하고 이제는 숨을 쉴 곳조차 없는 요즘 음악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여백의 아름다움은 남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하는 사랑만큼 너무도 크다.

    작년에 나온 앨범 중에 들을 만한 것이라면 The Ground다. 베이스음이 가끔 너무도 경망스럽기도 한 그리고 피아노의 리버브가 조금 모자라지만 나름대로 균형을 이룬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아름다움은 멜로디의 흐름이다. 팻 매씨니처럼 귀에 착착 달라붙지는 않지만, 수면에 달이 춤을 추듯 아주 천천히 나와 같이 숨을 쉴 수 있는, 듣는 것만으로 축복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오늘도 듣고 내일도 들을 만하다.

  • 교회, 자본주의 그리고 보수화

    “교회가 보수화하는 것은 교회 자신이 부자가 된 때문이지요. 부자의 논리에 함께 하는 교회는 이미 생명력을 잃은 것입니다. 가난한 이와 함께 하지 않는 교회엔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지요.”

    “출애굽은 구조와 제도로부터 해방이 실제 자유를 주지 못했음을 보여준다”며 “참된 해방은 ‘소유’로 부터 해방이다”고 말했다. 소유에 집착하는 한 생명력은 이미 사라진다는 것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00607.html

    고린도교회가 아마도 지금 우리의 교회보다 더 순수하지 않았을까 한다. 아마도 바울 같은 인물의 부재와 자본주의가 그 생명을 다하는 지금의 시간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저 막연한 신화적 영웅적 입장에서 예수를 보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잃게 하였는지 역사적 관점에서 그 사실을 증명할 사료가 부족하다 하나 동시대적 예수, 그리고 그의 사제, 더 나아가 초기 크리스챤이 어떠했는지 묻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무던히 시간에 묻혀 갈 곳을 잃을 것이다.

  • 악기

    악기를 다루는 모든 이의 손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란다.

    내 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악기들, 요즘은 내가 외면을 하는 것인지 그놈들이 나를 외면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같이 자리를 한 지는 꽤 지난 것 같다. 미안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나의 의지가 나약하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그놈들과 더욱 거리를 두는 것에 이젠 진저리가 난다.

    밖은 아직도 어두운데 나, 내가 무슨 작가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글만 읽고 쓰는 것이 요즘은 너무도 좋다. 언제 내가 스스로 솔직히 좋다.라고 말한 적도 없지만, 저놈들에게 자꾸 미안한 마음이 든다. 괜한 악기 욕심만 많아서 있는 돈 딱딱 털어 악기만 사려 했던 것도 그리 좋은 습관은 아닌 것이 분명하고 지금도 무엇인가 나의 약점을 채울 수 있는 놈이 있으면 무척이나 관심 있는 척 열을 올린다.

    아날로그나 디지털, 물론 디지털이 작업하기에 훨씬 수월하지만, 아직도 아날로그에 대한 막연한 추억이 발목을 잡기도 하고 이젠 완전히 한 걸음을 나가야 한다는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물론 나에 대한 변명은 확실하지 않는가.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리자.

  • 공동체

    사회나 공동체, 꼭 집어서 말한다면 그 차이가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그저 우리라는 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는 둘 다 부족함이 없다.

    홍세화의 글, “나눔과 분배라는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눔’은 우리말이고 ‘분배’는 한자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두 말은 분명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됩니다. ‘나눔’이 ‘독차지’의 반대말의 뉘앙스를 갖고 있다면, 분배는 ‘성장’과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단어의 뉘앙스는 간혹 그 단어의 모든 것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 권위라는 하는 것이 그러하였고, 그 결과 겉으로는 사회적 회색 인간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사회나 공동체에는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전주곡이 될지도 모른다.

    아픔을 나눌 수는 있으나 분배할 수는 없다. 물질에 한하면 분배라 하는 것이 원활하다 할 수 있으나 나눔에는 그 앞뒤가 잘 들어맞질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언제나 집단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기 때문에 개인이 나아가는 그 길이 우리의 길에 놓이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고 꿈을 꾼다.

    그 모든 조건 또한 나, 개인에서 출발하므로 개인의 정체성, 신이 부여한 권리나 의무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모래 위에 지은 집일 뿐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교훈이 버티고 있으므로 이런 말의 소용 가치는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으로 남고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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