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녹음의 기술

    솔직히 녹음은 별거 없다. 기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최대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최대한 내보내면 된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재생 또한 마찬가지다.

  • -성과 -ity

    요즘 글을 읽으면서 “-성”이라는 단어들 조어이고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잘 설명이 안 되는 것들 천지다. 게임성이 무엇인가? 음악성이라는 말에 빗대어 유추할 수는 있겠지만, 자꾸 눈에 거슬린다. 영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형용사나 명사 뒤에 -ity나 -ness를 붙여 어떤 집합적 의미를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학자라면 좀 더 쉽게 설명하고자 했을 것이고 진정한 기자라면 사실에 가까운 단어로 말하고자 했을 텐데 이제는 또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린 것일까. 추상적 단어는 추상 미술에 비해 아주 위험한 것이라 생각이 든다.

  • Pomme vs. France

    Apple과 France, 아주 재미있는 뉴스인 것은 분명하다. 한 일 년 전인가 애플에서 나온 사람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 데 itunes에 관련한 사업은 자신들의 수익모델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하드웨어를 파는 회사이고 ipod를 팔기 위한 한가지 방편일 뿐이라고. 어찌되었건 프랑스는 무엇이든지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 듯하다. 훔쳐간 조선의 보물을 바라며.

  • 파드캐스트

    한국어로 되어있는 파드캐스트가 많은 줄만 알고 이리저리 찾아다녔는데 들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하기야 이전부터 인터넷방송이라는 것으로 많은 것이 나왔었지만 조금은 아쉽다. 강유원의 철학에 관한 파드캐스트가 꽤 들을 만하다. 10년 전에 읽었던 공산당선언이라는 책을 다시 읽게 하니 말이다. 한글로 되어있는 책이 없는 관계로 조금은 불편하지만 나름대로 이해하기는 더 수월한 것 같다. 왜 번역도서가 더 어려울까 하는 질문은 아마도 쓰인 언어와 번역된 언어, 그 언어들이 속하는 사회나 시대, 그것들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된 번역은 반드시 제대로 된 의역만도 아닐 것이다. 번역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나 또한 그랬고, 아마도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 판단의 기준

    잘못된 기준은 그 사람의 인성과 많은 연관이 있다.

    길거리에 천당을 외치는 사람들, 혹은 불신지옥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이들은 기독교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그 기준은 기독교만을 향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 없는 교회가, 물론 예수는 교회에 있다, 너무 많기도 하겠지만, 모든 기독교는 그 기준이 아주 간단하다. 예수다. 예수는 모든 행동의 지표이고 그를 예언자라고 생각을 하든 선지자라고 생각을 하든 그는 명백한 정답이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 충분히 얘기하기 전에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집을 짓고 사람을 모으고 심지어 우리를 위해 예수를 팔기까지 했다. 원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예수가 있는가 라는 자문이다.

    목적이 없는, 찬양이 없는, 통성 기도가 없는, 모든 제외한 나와 예수만의 시간이 있는가? 그가 나의 주인이건 아니건 얻기 위한,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간에, 목적에 관련되어있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우리의 마음을 가리지는 않았는가?

    기억하건대 언제나 나의 마음은 예수가 아닌 종교의 어두운 짐이 나를 가로막았다. 일종의 세뇌라 해야 할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 말 그대로의 성경의 의미, 예수의 부활, 믿음의 근거가 될 만한 것들을 하나씩 내려보자. 그리고 남은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예수가 없는 교회에는 자동차만 즐비하다.

  • Miles Davis

    재미있게도 Miles Davis가 락명예전당의 새로운 멤버가 되었다. 이유는 그가 락 리듬을 실험적으로 그의 곡에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변명이고 단지 명예전당엔 Miles Davis의 이름이 필요한 것뿐이다. 미국이 하는 짓, 많은 경우 원칙은 없고 다수결만 있을 뿐이다.

  • 영어듣기능력

    아무리 상대적이라 해도 이건 너무 하다. 남부 사투리 때문일까? 가끔가다 이젠 영어로 공부하고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지는 않겠구나 생각을 하자마자 여지없이 무너진다. 몇 번인지 모를 정도로. 차를 고치러 가면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본다. 한국에서. 그럼 로스트에서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정말 한국어인지 물어본다. 재미있다. 뭐 좋다. 거기까지다. 그다음에 하는 말들은 솔직히 잘 못 알아듣는다. 심지어 차 고치는 사람에게 어디 어디를 고치고 하는 말들 이것도 잘 안 들린다. 문제다. 교수들이 말하는 것, 그리고 뉴욕에서 온 사람들, 이 사람들 하고만 의사소통이 가능하니 정말 쉽지만은 않다.

    내일은 영어로 화를 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걱정이다. 언어의 장벽은 이상하게도 멍청한 친절함으로 나타난다. 자신감은 나에게 사라져진 지 오래일까?

  • 표절

    표절이건 아니건 일차적인 잘못은 분명히 윤리의식이 부족한 대중에게 있다.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를 묵인하는 것, 왜 아직도 우리가 계몽이 필요한가 하는 질문의 대답이다. 사실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궁극적은 문제가 될 수 없다. 언제나 문제는 행위의 주체에 종속된다. 우리가 어디에 속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에 상실되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모든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 Shameless Self-promotion

    간혹 TV에 나온 연예인들이 자신의 앨범이나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에 대해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혹은 웃으며 광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수줍은 표정을 짓는 것은 아마도 양심의 장치인 염치가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먹고 살기 위해 한다면 얼마나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먹어야 할까? 점은 선의 길이를 알지 못하고 선은 면의 넓이를 알 수 없다.

    자신을 알리는 행위, 반드시 “나쁘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지만 염치없는 행동, 양심이 있다면 그 양심에 염치가 있다면 그 염치가 작동을 한다면 입을 열어야 할 필요는 없다.

  • 사랑

    지금 어디에선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있을 것이고
    또 어디에선가는 섹스를 하고 있을 것이고
    또 지금 어디에선가 사랑을 하고 있겠지.

    거짓말 좀 해봐. 내가 너를 믿을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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